엎드린 용과 어린 봉황
형주(荊州) 양양(襄陽, 지금의 후베이성
샹양(襄陽)) 출신으로,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봉추(鳳雛)이다.
당시 양양의 명사였던 방덕공이
‘와룡(臥龍)’으로 불리던 제갈량에 견주어
방통을 ‘봉추(鳳雛)’라고 불렀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두 사람을 이렇게 불렀다.
서서는 일찍이 유비에게 와룡과 봉추 중
한 사람이라도 얻으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했다.
방통이 동오의 육적, 고소(顧邵) 등과
인물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스스로를 제왕을 보좌할
재능이 있다고 평했다.
방통은 외모가 소박하고
우둔해 보이기까지 하여 그의 자질을
제대로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 수경선생(水鏡先生) 사마휘가
그의 인물됨을 보고 추천하여
오나라 주유 휘하에서 공조로 일하게 되었다.
주유가 죽은 후
방통은 촉한 유비의 신하가 되었지만
방통의 재능보다 외모를 보고 판단한 유비는
그를 뇌양현의 현령으로 보내고 말았다.
어느 날 장비가 뇌양현에 갔다가
방통의 재능을 알아보고 유비에게 천거했다.
이어 제갈량이 그의 재주를 인정해
치중종사(治中從事)에 발탁했고,
제갈량과 함께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이 되었다.
방통은 유비가 촉(蜀, 지금의 쓰촨성)으로
진군하자 계책을 올려 익주를 취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의
부장(部將)을 참수하고
낙(落, 지금의 허난성 뤄양시 지역)현을
포위 공격할 때 낙성(雒城)에서 싸우다가
유비의 군대가 함정에 빠지는
절체절명의 순간,
방통은 유비로 변신하고 적진에 뛰어 들어
유비를 구출하고 난 후
매복한 적의 화살에 맞아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방통이 묻힌 곳은 낙봉파(落鳳坡)라 불린다.
유비는 방통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관내후(關內侯)라는 작위와
정후(靖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와룡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제갈공명이다.
이름은 량이다.
가장세가 약하고 늦게 세를 불리던
유비로 부터 삼고초려란
유명한 일화를 후세에 남기며 발탁되서
적벽대전을 필두로 평생을 유비와
그의 아들인 유선 때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전략가였다.
봉추는 본명이 방통이며
당대 최고의 명문으로
수많은 식자를 배출한 수경 사마휘 선생의
수제자중 한사람 이었다.
수경 선생을 거쳐 간 명사들 중
가장 생각나는 사람들이 셋이 있다.
첫째가 서서이고
둘째가 와룡
세째가 봉추다.
이중 수경 선생이 유비현덕에게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두 사람을 추천하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와룡과 봉추였다.
두 사람 중 어느 한사람만 있어도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조언 하였다.
그중 먼저 유비가 찾은 사람이
제갈량 이었고 적벽대전의 승전이후
형주를 취하고 나서 촉을 취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즈음
방통이 유비를 찾아옴으로써
유비는 한꺼번에 당대 최고의 지략가
둘을 동시에 갖게 되었고
촉을 취함으로써 삼국이 정립되는
삼국 시대를 열게 되었다.
와룡과 봉추는 둘 다 지략과 천문, 지리 등
모든 분야에서 역대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었으나 외모와 성격,
시대적 운은 많은 차이점을 보인 것 같다.
우선 제갈량은 귀공자 타입에
성격이 매우 꼼꼼하고
계산을 보다 더 정확하게 하였고,
냉정하고 조용한 벽안의 선비였다.
기다릴 줄 알았고 기회가 오기 전까지는
결코 자신을 외부에 전혀
노출 시키지도 않았으며,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알았으며,
심리전에 달통했다.
봉추는 몰골이 매우 천해 보여
사람의 호감을 사지는 못했다.
비교적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자질면에서는 오히려
와룡보다도 앞서는 면이 많았다.
조조의 위나 손권의 동오에 비해
너무 늦게 시작되고 기본 밑바탕이
전혀 없던 유비를
조조와 손권과 같이 맞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 봉추의 능력은
어쩌면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제갈공명 보다도 실천적 행동에서는
오히려 더 우수한 면이 많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못 미치는 부분이 몇이 있었다.
이것은 최정점에 있는 이에게는
치명적인 것 같다.
우선은 몸 안팎에서 풍기는 매력이고,
양자였던 마속의 목을 벨 수 있는
냉혹함이며,
다잡은 사마의 중달 삼부자를
동시에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실패 시 야기될 국가 존폐의 위험성을
염려해 이를 포기하고 내일을 기약하는
치밀성과 냉정함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을
그릇을 찾는데 있어서도
그릇을 가진 사람의 사람됨과
시대 운을 먼저 계산한 후
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찾을 때까지
은둔할 수 있는 끈기였다.
이런 몇 안 되는 장점이 결국
두개의 태양 중 하나는 뜨고
하나는 지는 운명을 맞이했다고 본다.
지는 운명을 맞이했던 봉추 선생은
세인들의 기억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나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추정컨데 만일 역사와는 달리
와룡이 먼저가고 봉추가 남아서
유비와 함께 천하를 다퉜다면 어찌됐을까?
어쩌면 더 빨리 천하통일이 이루어지고
그 영향이 당시 초기 상태였던
우리 고구려에도 많은
악영향이 미쳤으리라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와룡이나 봉추보다도
휘경 문중의 대 선배인 서서의
현실 파악과 자신보다 뛰어난 후배를
경배하고 추천할 수 있는 지혜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에게
더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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